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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름 |
파(派) |
세(世) |
관계 |
부(父) |
조부(祖父) |
구보 |
신보 |
계도 |
책 |
이력 |
촌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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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信庵
高麗侍中 父시중升茂 子禮賓尹걸 子승지澤 子대호군均 子감역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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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신암
고려시중 부시중승무 자예빈윤걸 자승지택 자대호군균 자감역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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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家한 法名이다. 文章에 能하고 글씨를 잘 써서 東文選(조선초에 역대의 잘된 글만 엮어 놓은 책)에 글 몇 편이 전하고 벼슬이 三重大匡으로 王의 총애를 받았다. 廢縣이 된 동복 고을이 公의 덕으로 복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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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한 법명이다. 문장에 능하고 글씨를 잘 써서 동문선(조선초에 역대의 잘된 글만 엮어 놓은 책)에 글 몇 편이 전하고 벼슬이 삼중대광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다. 폐현이 된 동복 고을이 공의 덕으로 복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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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宰臣公派】
武科及第 宰臣에 오르다.
墓海南郡溪谷面法谷里六○六番地에 단비를 建立하고 宗中子孫들이 每年 陰歷十월十일에 祭享을 모시고 있다.
海南郡 北平面 烏山里 山九三七-二一番地에 追慕碑를 세우고 每年 陰歷十월十一일 祭享을 올린다. 一九八四年 재신공추모비를 세우고 碑銘은 二十四대손 석일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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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신공파】
무과급제 재신에 오르다.
묘해남군계곡면법곡리육○육번지에 단비를 건립하고 종중자손들이 매년 음력십월십일에 제향을 모시고 있다.
해남군 북평면 오산리 산구삼칠-이일번지에 추모비를 세우고 매년 음력십월십일일 제향을 올린다. 일구팔사년 재신공추모비를 세우고 비명은 이십사대손 석일이 지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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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賛成이시다.
配安東權氏
墓위와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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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뇝성이시다.
배안동권씨
묘위와같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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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贊成
配金海金氏
墓設壇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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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찬성
배김해김씨
묘설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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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將軍公派】
큰형과 더불어 같은 科擧에 武科로 及第하여 神虎衛大將軍을 지냈다. 鳳山派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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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군공파】
큰형과 더불어 같은 과거에 무과로 급제하여 신호위대장군을 지냈다. 봉산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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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器寺의 監役
配高靈申氏父郡守子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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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시의 감역
배고령신씨부군수자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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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將仕郞公派】
將仕郞 후손 전문화공보부장관 在璟께서 경기도 의정부시 외곽에 壇을 세웠다. 後孫을 將仕郞公派로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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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랑공파】
장사랑 후손 전문화공보부장관 재경께서 경기도 의정부시 외곽에 단을 세웠다. 후손을 장사랑공파로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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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名祁字興雨
號東軒
諡文齊
고려 충숙왕 때에 重大匡 품계로 僉議府의 贊成事로서 右文館의 大提學이며 春秋館의 監事와 摠府의 判事로서 龜城君에 封해지다.
行狀은 墓誌文에 실려있다.
墓朝廷의 예우를 받아 경기도 장단 대덕산 동쪽 기슭 유좌로 모셨다.
配이천申氏
墓진서면눌목리서쪽대덕산합장
父尙書瑱으로 전하나 묘지문에는 通議大夫 품계에 禮賓寺의 판사며 春宮(왕세자)의 侍讀學士와 史館의 修撰官과 知制誥를 지낸 頊의 따님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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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기자흥우
호동헌
시문제
고려 충숙왕 때에 중대광 품계로 첨의부의 찬성사로서 우문관의 대제학이며 춘추관의 감사와 총부의 판사로서 귀성군에 봉해지다.
행장은 묘지문에 실려있다.
묘조정의 예우를 받아 경기도 장단 대덕산 동쪽 기슭 유좌로 모셨다.
배이천신씨
묘진서면눌목리서쪽대덕산합장
부상서전으로 전하나 묘지문에는 통의대부 품계에 예빈사의 판사며 춘궁(왕세자)의 시독학사와 사관의 수찬관과 지제고를 지낸 욱의 따님이라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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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名方愿字白雅
號訥齋
一二八四年甲申七月五日生 恭愍王 때인 一三五二年에 奉翊大夫 품계에 密直司의 판사이며 右文館과 摠部의 판사를 지내고 세습하여 龜城君에 封해지다. 政事를 돌보던 十四년 동안은 辛旽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법을 어기는 데에 柳淑 鄭世雲 등과 같이 나라를 해치는 사람은 머리를 깎아 내쳐야 한다고 왕에게 諫하였으나 듣지 않자 속으로 생각하기를 더이상의 뜻을 접기로 하고 가솔인 다섯 아들과 세 딸 그리고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데리고 광나루를 지나 初月(광주군 초월면) 길(路)의 池月峯 아래에 臺를 쌓고 숨어 살게 되었다. 그곳을 말문이 막혔다 하여 言社라 하고 世上을 근심하고 탄식하다. 一三六六年丙午九月二十五日卒
墓지월봉뒷기슭塞邊壇유좌 冶隱 吉再선생이 지은 行狀이 있다.
配礪山宋氏父密直司事左副承旨瑨 一三六六年丙午十一月三日卒
墓合葬
이하 三世 분묘가 수백년 동안 失傳되었다가 宗人 理泳이 전한 바를 덕산리 宗人 在道가 省尋하여 그 사실을 大同譜 首卷에 실었다.
※二○○四年十一月六日에 이하 三世 분의 묘역을 정화하고 묘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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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방원자백아
호눌재
일이팔사년갑신칠월오일생 공민왕 때인 일삼오이년에 봉익대부 품계에 밀직사의 판사이며 우문관과 총부의 판사를 지내고 세습하여 귀성군에 봉해지다. 정사를 돌보던 십사년 동안은 신돈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법을 어기는 데에 류숙 정세운 등과 같이 나라를 해치는 사람은 머리를 깎아 내쳐야 한다고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자 속으로 생각하기를 더이상의 뜻을 접기로 하고 가솔인 다섯 아들과 세 딸 그리고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데리고 광나루를 지나 초월(광주군 초월면) 길(로)의 지월봉 아래에 대를 쌓고 숨어 살게 되었다. 그곳을 말문이 막혔다 하여 언사라 하고 세상을 근심하고 탄식하다. 일삼육육년병오구월이십오일졸
묘지월봉뒷기슭새변단유좌 야은 길재선생이 지은 행장이 있다.
배여산송씨부밀직사사좌부승지진 일삼육육년병오십일월삼일졸
묘합장
이하 삼세 분묘가 수백년 동안 실전되었다가 종인 이영이 전한 바를 덕산리 종인 재도가 성심하여 그 사실을 대동보 수권에 실었다.
※이○○사년십일월육일에 이하 삼세 분의 묘역을 정화하고 묘비를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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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名法華字成碩
一三四五年乙酉八月三日生 太祖건국원년(一三九二年)에 三司 左尹이고 一三九六年 檢校로 門下部의 叅贊事이다. 辛旽의 亂에 아버지를 따라 言杜로 가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후 池月로 돌아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속시원하게 지내고 재물에 욕심이 없이 의리를 중히 여기며 불교를 멀리하였다. 子弟를 하루 가르칠 때 선생이 묻기를 뭣하려고 밤낮없이 공부를 하느뇨 하니 公께서 "어려서 배움은 해가 떠서 별이 나고 어른이 되어서 배움은 빛이 나고 늙어서 배움은 촛불처럼 빛이 난다"하였고 스스로 號를 雙淸이라 하니 그 명성이 鄕人들 사이에 드높았으니 鄭康成(한나라 때 학자) 鄭玄과 같았다. 또 號를 灘叟라 하다가 성품은 좁고 너무 깔끔해서 사람들이 꺼려하므로 크게 쓰이지 못했다. 一四○七年丁亥十月卒
墓先墳아래유좌
配永嘉郡夫人安東權氏父玄福君廉 一四一九年己亥九月五日卒
墓合葬 비석과 사람 모양의 돌과 석등이 있다.
贊成事에 호가 松齋인 準의 손녀요 溥의 증손녀요 찬성사인 상원 趙璉의 외손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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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명법화자성석
일삼사오년을유팔월삼일생 태조건국원년(일삼구이년)에 삼사 좌윤이고 일삼구육년 검교로 문하부의 참찬사이다. 신돈의 란에 아버지를 따라 언두로 가서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후 지월로 돌아와 마음을 깨끗이 하여 속시원하게 지내고 재물에 욕심이 없이 의리를 중히 여기며 불교를 멀리하였다. 자제를 하루 가르칠 때 선생이 묻기를 뭣하려고 밤낮없이 공부를 하느뇨 하니 공께서 "어려서 배움은 해가 떠서 별이 나고 어른이 되어서 배움은 빛이 나고 늙어서 배움은 촛불처럼 빛이 난다"하였고 스스로 호를 쌍청이라 하니 그 명성이 향인들 사이에 드높았으니 정강성(한나라 때 학자) 정현과 같았다. 또 호를 탄수라 하다가 성품은 좁고 너무 깔끔해서 사람들이 꺼려하므로 크게 쓰이지 못했다. 일사○칠년정해십월졸
묘선분아래유좌
배영가군부인안동권씨부현복군렴 일사일구년기해구월오일졸
묘합장 비석과 사람 모양의 돌과 석등이 있다.
찬성사에 호가 송재인 준의 손녀요 부의 증손녀요 찬성사인 상원 조련의 외손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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初諱濟富字崇之
號竹軒
恭愍王朝 一三六四年甲辰生 태종임금과 같이 文科에 급제하고 崇政大夫로 中樞院판사로서 修文殿의 大提學을 지냈다. 諡號는 靖平으로 네임금(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모신 오랜 臣下로 一四一四年 京畿道觀察使로 제수되어 옷(衣) 안팎감 한 벌을 받고 一四二二年에 賀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임금이 친히 보약을 下賜하였다. 十二월에는 태종임금의 諡號를 올리는 일에 있어서 서울에 이르렀을 때 겨울 옷 두 벌과 털갓(毛冠笠) 신발을 하사받았다. 一四二六年十一월에는 咸吉道 관찰사에 藝文館의 大提學이 되고 一四二九年 겨울에 正朝使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一四三○年 皇帝의 勅書와 王世子 朝服 한 벌을 받아서 돌아오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말(馬) 안장을 하사하시고 慶會樓에서 잔치를 베풀며 公을 위로하였다. 一四四一年辛酉三月卒
墓선친묘아래유좌 藝場으로 모셨다. 손병춘이 모은 世稿가 있다.
配珍原郡夫人尹氏 一四四四年甲子九月十八日卒
墓合葬 비석과 석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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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휘제부자숭지
호죽헌
공민왕조 일삼육사년갑진생 태종임금과 같이 문과에 급제하고 숭정대부로 중추원판사로서 수문전의 대제학을 지냈다. 시호는 정평으로 네임금(태조 정종 태종 세종)을 모신 오랜 신하로 일사일사년 경기도관찰사로 제수되어 옷(의) 안팎감 한 벌을 받고 일사이이년에 하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오니 임금이 친히 보약을 하사하였다. 십이월에는 태종임금의 시호를 올리는 일에 있어서 서울에 이르렀을 때 겨울 옷 두 벌과 털갓(모관립) 신발을 하사받았다. 일사이육년십일월에는 함길도 관찰사에 예문관의 대제학이 되고 일사이구년 겨울에 정조사로서 명나라에 갔다가 일사삼○년 황제의 칙서와 왕세자 조복 한 벌을 받아서 돌아오니 임금께서 가상히 여겨 말(마) 안장을 하사하시고 경회루에서 잔치를 베풀며 공을 위로하였다. 일사사일년신유삼월졸
묘선친묘아래유좌 예장으로 모셨다. 손병춘이 모은 세고가 있다.
배진원군부인윤씨 일사사사년갑자구월십팔일졸
묘합장 비석과 석상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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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隱公派】
生父冲見下
字伯宗號歸隱
一四○七年丁亥生 一四七二年(세종조)에 集賢殿 學士로 뽑혔고 獨谷(조선 초기의 영의정인 성석린의 호) 成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端宗이 수양대군에게 王位를 내어주자 지리산 자락의 雲峰 산덕리에 숨어 살았다. 단종이 승하하자 壇을 쌓고 祭를 지냈다. 그 일로 인하여 병을 얻어 一四八九年己酉五月二十日卒하였다.
墓남원군산내면묘동자좌
一七八九年에 德林院에 모셔 제를 지냈다. 위의 사실은 莊陵誌(단종에 관한 책)에 실려있다. 릭宇郭鍾錫이 지은 墓碣銘이 있고 果齋 張錫蓋와 晦堂 張錫英이 지은 行狀에 가로되 그 처음은 秋江(생육신 남효원의 호) 선생의 觀瀾之뻐요 끝은 梅竹(사육신 성삼문의 호) 선생의 백옥같은 정성이라 하였다.
配全州李氏父正彦晋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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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은공파】
생부충견하
자백종호귀은
일사○칠년정해생 일사칠이년(세종조)에 집현전 학사로 뽑혔고 독곡(조선 초기의 영의정인 성석린의 호) 성선생으로부터 수업을 받았다.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내어주자 지리산 자락의 운봉 산덕리에 숨어 살았다. 단종이 승하하자 단을 쌓고 제를 지냈다. 그 일로 인하여 병을 얻어 일사팔구년기유오월이십일졸하였다.
묘남원군산내면묘동자좌
일칠팔구년에 덕림원에 모셔 제를 지냈다. 위의 사실은 장릉지(단종에 관한 책)에 실려있다. 릭우곽종석이 지은 묘갈명이 있고 과재 장석개와 회당 장석영이 지은 행장에 가로되 그 처음은 추강(생육신 남효원의 호) 선생의 관란지뻐요 끝은 매죽(사육신 성삼문의 호) 선생의 백옥같은 정성이라 하였다.
배전주이씨부정언진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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幸州人 郡守이며 規正을 지낸 重濟의 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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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주인 군수이며 규정을 지낸 중제의 아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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