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백에 관한 대표적인 역사기록서로는 오월춘추와 사기가 있다. 이 두 개의 역사서는 내용에서 다소 다른 점이 있다.사마천이 지은 사기는 중화사관에서 기록한 것이고 진실을 왜곡한 부분이 적지 않다는 것이 한국의 재야 사학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런데 오월춘추는 왜곡이 비교적 적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오월춘추 오태백전의 내용에는 우리가 주목해서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단서들이 있다. 태백이 형만으로 가서 자호를 구오라고 지었을 때에 오인들이 태백에게 “어떤 이유로 자호를 구오로 했습니까?” 하고 물었다는 오인들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당시에 오인들의 존재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태백은 왕위계승문제로 강남 무석 매리로 오기전에 먼저 주부락 기산에서 멀지 않은 오산으로 도망을 갔다. 오산은 예로부터 오씨부족이 터를 닦고 살고 있던 곳이다. 태백은 오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곳에서 은거했다. 후에 오산의 오인들은 태백을 따라 강남 무석 매리로 가서 태백을 도와 오국을 건설했다.
고공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장자는 태백이고 차자는 중옹으로 일명 오중이고 막내는 계력이다. 계력은 태임씨를 아내로 얻어 창을 낳았는데 상서로운 징조가 있었다. 고공이 창에게 상서로움이 있음을 알고 그는 “왕업을 일으킬 자는 바로 창이 아니겠는가?”말하면서 장차 왕위가 창에게로 계승되기를 원하였다. 태백과 중옹은 고공이 계력을 통해서 창에게 왕위를 계승시기고자 하는 의중을 알고는 고공이 병이 들었을 때에 부왕을 위해 약초를 얻기 위해 형산으로 간다고 핑계를 삼고는 형만으로 달아났다. 형만인들이 태백을 존귀히 여기어 그를 지도자로 옹립하였으며 태백은 자신의 호를 구오라 하였다. 오인들이 태백에게 왜 호를 구오라고 하였습니까? 묻자 태백은 대답하기를 나는 적사자이지만 계승할 아들이 없음으로 중옹이 적사자가 되었으니 나의 호를 구오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가? 라고 하였다. 형만인들이 태백을 존귀히 여기어 천여호가 그를 추종하였으며 그를 지도자로 옹립하였다. 수년이 흐른 후에 은나라 말기 세상은 혼란해지고 전쟁이 많이 발생하였다. 이에 형만인들이 불안해하므로 태백은 300여리의 성을 쌓았다. 고공이 병들어 죽자 계력은 태백에게 양위를 하려고 하였지만 태백은 세 번이나 양위 받기를 사양하였는데 이를 일컬어 태백이 천하를 세 번 양보하였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계력이 왕위를 계승하여 선왕의 유업을 이어갔다. 계력이 죽고 창이 왕위를 계승하였는데 그가 바로 서백이다. 그는 공유와 고공의 유업을 받들어 천하를 잘 다스려 나라가 태평하였다. 서백이 죽은 후 발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그는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안정시켰다. 이때 비로소 그는 자신을 왕으로 호칭하였으며 고공을 대왕으로 추시하고 태백을 오에 추봉하였다. 태백은 죽어서 매리 평허에 묻히고 중옹이 태백을 계승하여 오중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