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오산은 주(周)부락 기산에서 서쪽으로 100km정도 떨어진 산골이다. 이곳은 예로부터 전해오는 오태백에 관한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태백은 왕위계승문제로 주부락 기산을 떠나 강남 무석 매리로 오기 전에 먼저 오산으로 도망을 가서 은거했다. 오산은 예로부터 오씨부족이 터를 닦고 살던 곳이다. 태백은 그곳의 오인들의 도움을 받으며 은거하였고 후에 오산의 오인들은 태백을 따라 강남 무석 매리로 가서 태백을 도와 오국을 건설하였다.
오산은 진령과 롱산이 둘러싸고 있는 한 가운데 있는 산으로 많은 산 중의 으뜸이다. 오산은 중국이 있는 5개 진산 중 서진의 명산으로 오악 또는 악산이라고도 부른다. 산세가 높으며 5개 봉우리가 매우 수려하다. 그곳에는 130개가 넘는 비석에 수 천년 전에 역대 제왕들이 제사한 기록들이 있다. 또한 그곳에는 오태백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먼 옛날 우하시대에 주태왕 고공단보는 후직과 공유의 유업을 계승하여 유목민족인 주부락을 선진농업부락으로 발전시키고자 부족들을 데리고 빈을 떠나서 칠수와 저수를 건너고 양산을 넘어 위하 북쪽 기슭에 있는 기산의 평야지대로 이주하여 나라를 안정시켰다. 고공단보에게는 세 아들이 있는데 장자는 태백이고 차자는 중옹이며 삼자는 계력이다. 계력의 아들 희창이 총명하고 영리하고 왕의 풍모를 가졌다. 그리하여 고공단보는 주부락의 먼 장래를 생각하여 계력에게 왕위를 계승하여 창에게 이어지게 하려고 하였다. 또한 여기에는 계력의 처 태임이 강성부락의 수령의 딸이기 때문에 혼인관계를 통한 정치적인 연합을 도모하고자 한 것으로도 보인다. 당시 힘이 없는 주부락의 입장에서 정치적인 연합을 이루는 일은 중요한 일이었다. 고공단보는 여러 가지를 고려하며 계산하였지만 분쟁이 생길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당시 씨족의 규정에 따르면 장자인 태백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였다. 규정을 어기고 왕위를 계승하면 역풍이 불어서 큰 어려움에 봉착할 것 같아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태백은 부왕의 수심이 가득한 모습을 보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부왕의 마음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즉시 동생 중옹과 상의한 후 부왕에게 약초를 구하러 산에 간다고 핑계를 대고 기산에서 멀지 않은 오산(100km)으로 도망하였는데 이는 매우 현명한 결정이었다. 이처럼 두 형이 결연한 자세로 도망간 상황 하에서 마침내 계력에게 왕위가 계승되었다. 후에 고공단보가 죽자 태백과 중옹이 급히 집으로 돌아오자 계력은 합법적으로 왕위 계승권자인 태백에게 왕위를 돌려주려고 하였다. 그러나 태백은 단호히 사양하였다. 태백이 오산으로 돌아온 후에도 계력은 오산으로 찾아와서 예를 갖추며 태백에게 왕위를 이양하고자 하였다. 이에 태백은 할 수 없이 중옹과 더불어 오산의 부족인 오인들을 데리고 먼 남쪽으로 이주하여 강소성 무석 일대에서 오국을 건립하였다.